장찬수 판사님, 안녕하십니까. 


판사님께서 현장검증을 제안하셨을 때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제주 해군기지 반대 운동으로 지난 10년간 여러 차례 재판을 받았지만, 현장검증을 직접 요청하신 판사님은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해군은 제가 군사시설을 파손하고 영내를 무단 침입했다고 고소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객기로 일탈 행위를 저지른 무법자로 간주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현 상황은 폭력으로 남의 집을 차지한 도둑들이 집 안에 있는 보물을 찾으려고 울타리를 뜯고 들어온 주인을 재물 손괴와 불법 주거 침입죄로 고소한 것과도 같습니다. 강정에 지어진 해군기지는 국가 안보 사업이라는 미명하에 편법과 불법으로 지어졌습니다. 정부가 주민들을 비밀리에 꼬드겨 돈과 이권을 약속해 자기편을 만들어 앞잡이로 삼아 마을 공동체를 붕괴시켰습니다.

강정마을 공동체는 찬성과 반대파로 갈라져 서로 싸웠고, 해군기지가 이미 완성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깊은 갈등의 골을 메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정 해군기지 건설은 정부가 스스로 민주주의라는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현저히 훼손시킨 범죄행위였습니다. 2008년 9월 17일 제주도 유관 기관 대책회의에서 국정원은 주민들을 겁박해 공사를 진행하라고 충고했고, 이후 2010년 부임한 조현오 경찰청장은 수많은 시민을 사법 처리해 이 불법적 공사를 도왔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해군기지 건설을 적극 추진했던 정치인들과 공무원들 다수가 현재 구속 수감되어 있거나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과 조현오 전 경찰청장,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이 그들입니다. 이들 중에는 군납 비리에 연루된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강정마을까지 찾아와 직접 사과까지 했다는 사실이 이 해군기지 건설 과정이 떳떳하지 않았음을 방증합니다.

이상한 일은 그들이 불법으로 완공한 해군기지는 지금 강정에 건재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구럼비바위는 그 기지 안에 갇혀 있습니다. 강정 앞바다 공유수면에 위치한 구럼비는 원래 모든 시민의 공공재였습니다. 구럼비바위는 많은 희귀 동식물이 서식했던, 아름다우면서도 거룩한 느낌을 주는 천혜의 자연유산입니다. 해군은 대부분의 구럼비바위를 파괴하고 그 위에 시멘트 콘크리트를 부어 부두와 군사시설을 세웠지만, 차마 이를 모두 매장하기에는 양심에 걸렸는지 일부를 억지로 공원화해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습니다. 웅장한 자태는 사라지고 초라한 몰골만 남았지만, 그것만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 다행입니다.

3월 7일은 공사 측이 구럼비바위를 화약으로 파괴한 지 8년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구럼비가 일부 남아 있는 기지 내 수변 공원에 들어갔습니다. 예전에 그곳에서 늘 했던 것처럼 제주도가 진정한 평화의 섬이 되고 강정마을 공동체가 회복될 수 있도록, 구럼비가 다시 복원되어 모든 시민에게 개방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저는 2월 14일부터 그날까지 세 차례 정식 방문 요청을 하였으나 서로 다른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구럼비바위에 갈 방법을 달리 찾지 못해 기지의 펜스를 절단해 입장했습니다. 저는 구럼비바위가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는 군부의 집단 이기주의로 부당하게 사유화된 점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구럼비는 모든 시민의 것입니다.

구럼비 안에서 솟아나는 할망물은 신성한 샘물이었습니다. 해군들은 주민들의 종교적 성정을 무시한 채 터부를 건드렸습니다. 저는 강정 해군기지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군사기지가 들어서면 안 되는 곳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군부가 권력욕에 이끌려 세력 확장에 눈이 멀어서 성스럽게 구별되어야 할 공공의 자연유산을 국민에게서 빼앗아 배타적으로 점유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 습관을 따라 구럼비를 향해 걷다가 불현듯 나타나는 철조망이 무척 낯설게 느껴집니다.

해군기지는 자신들이 삼킨 구럼비를 감당하지 못해서 반드시 토해 내는 날이 불원간 올 것입니다. 저는 그 다가올 미래를 미리 살아 내는 것이고, 그로 인한 고통을 달게 받을 것입니다. 저는 전쟁도 군대도 반대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 존중해야 할 것들을 무시하고 파멸하는 반인도주의적 범죄행위입니다. 저는 강정 해군기지를 폐쇄하고 이를 동북아시아의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평화 회담과 협상의 장소로 전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구럼비는 다시 복원해 원래 주인인 국민 모두에게 반환되고 개방되어야 합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제 주변의 많은 사람이 이미 군사기지가 지어졌는데 왜 10년이 다 가도록 끝난 일을 붙들고 있냐고 꾸중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오면서 힘 있는 자의 불의와 패악질에 저항해도 결국 피해만 보게 된다는 자기 검열과 강자 앞에는 스스로 무릎을 꿇는 비겁한 굴종에 길들여져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성세대는 비굴한 침묵을 철이 드는 것으로, 부끄러운 방관과 외면을 성숙해 가는 것이라고 세뇌해 왔습니다.

한때 강정마을 주민 대부분이 해군기지 건설이 부당하다고 강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때 강정마을 전체를 노랗게 뒤덮었던 깃발들은 꺾이고 부러져 변두리에나 을씨년스레 서 있습니다. 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로 쓰인 '해군기지 결사반대'는 이제 빛이 바래 알아볼 수조차 없고 세찬 바닷바람에 실밥들이 풀려 나가 손바닥만 해진 초라한 깃발들이 듬성듬성 서 있을 뿐입니다.

강정마을회는 더 이상 해군기지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정의롭다고 여겼던 해군기지 반대 투쟁을 이제는 포기했습니다. 해군은 마을에 평화가 왔으니 화해와 상생을 이야기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마을을 짓누르는 이 침묵과 고요는 찬성도 동의도 아닙니다. 좌절과 낙담이고 환멸과 체념입니다. 약삭빠른 이들은 나서서 정부의 보상금과 지원금을 나누어 갖는 일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안타깝게도 강정 안에 있는 어느 교회나 사찰도 정의를 외치는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유일한 정의의 소리는 작고 남루한 미사 천막을 지켜 오신 소수의 천주교 사제들과 수녀와 수사들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강정마을을 차마 떠나지 못하는 평화를 사랑하는 시민들과 소수의 마을 토박이들입니다. 저는 이들과 한 몸입니다. 아무리 시류가 변하고 대세가 기울어도 저는 "검은 것은 검다. 흰 것은 희다"고 하는 증인으로 남을 것입니다.

해군은 불법적으로 구럼비바위를 점령하고 그 위에 군사기지를 지었습니다. 저는 해군기지 안에 갇힌 구럼비바위의 진정한 주인인 시민 한 사람으로서 그 구럼비에서 종교적 행위를 할 권한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3월 7일 그곳에서 평화의 섬 제주도가 전쟁도 군대도 없는 진정한 평화의 섬이 되도록, 상처 입은 강정마을 공동체가 회복되고 치유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2011년 3월 8일 강정에 내려온 후 지금까지 매일 아침에 드렸던 기도였습니다. 처음에는 구럼비바위로 걸어가 기도했습니다. 그해 9월 구럼비를 둘러싸고 철조망과 장벽이 쌓인 이후에는 바다를 통해 그곳까지 헤엄쳐 가서 기도했습니다. 해군이 저를 물속에 집어넣기도 하고 바다에서 구타하기도 했지만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해군기지를 지어 더 들어갈 수 없게 된 후에는 구럼비가 멀리서나마 보이는 강정포구 방파제 끝에서 기도했습니다.

저는 제 신념과 행동을 모두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한 일에 대해 후회하지도 않습니다. 앞으로도 모든 시민의 재산인 구럼비를 되찾아 그곳에서 이전처럼 평화를 위한 기도를 계속할 것입니다. 재판장님은 이런 저에게 어떤 판결을 내릴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어떤 판결이든 역사의 기록으로 남을 것입니다.

2020년 8월 20일
제주교도소에서
송강호 올림

[출처: 뉴스앤조이] 판사님, 저는 해군이 파괴한 구럼비를 되찾아 평화의 기도를 계속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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