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평화 신학 1

2021.01.1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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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평화 신학


이 글은 강정의 그리스도인들과 강정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언젠가 강정의 활동가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강정의 평화운동에 대한 의미를 이야기 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나는 강정에서 평화가 시작되리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 분의 말씀이 오직 강정에서만 평화 운동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여전히 강정아 너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너에게서 온 나라의 평화가 시작되리라는 강우일 주교님의 노랫말에 공감과 동의를 하는 이유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 노랫말의 기원은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너에게서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어 다스릴 자가 나오리라는 성경말씀(2;6, 미가 5;2)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이면서 그로 인해 수 많은 어린 아이들이 무고한 피를 흘리게 된 학살터 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군사기지가 지어지는 과정에서 겪은 마을 공동체의 파괴와 국가 공권력의 폭압 그리고 이 군사기지로 인해 발생할 무력갈등에서 빚어질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과 어린아이들의 희생이 베들레헴에서 죽어간 어린아이들의 억울한 희생과 같은 형태의 사건이라고 봅니다. 또한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하느님은 오늘날 강정의 길가의 천막에서, 비닐하우스의 단촐한 식탁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옛날의 사건이 오늘날 우리의 사건으로 재해석되어 과거는 우리의 현실에서 다시 현재화 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22)는 말씀은 원래 이사야서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사야 7;14) 이 예언의 말씀은 주전 600년경 히스기야왕의 탄생을 예언한 것이었습니다. 야훼신앙이 바알 종교에 밀려 절망적인 파국을 맞고 있는 상황에서 그 신앙을 다시 회복할 희망을 예언했던 것입니다. 원문의 [처녀]는 사실상 [젊은 여인]이란 번역이 더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히스기야 왕을 낳게되는 아하즈왕의 아내를 지칭했었던 것이 었으니까요. 그러나 이후 70인역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되면서 이를 [처녀]로 번역한 것이 성모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을 위한 성스러운 [오역]이 된 셈입니다


지나간 역사가 새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사람들에 의해서 새롭게 해석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강정에서도 벌어지는 일입니다. 우리가 강정마을에서 베들레헴의 역사성을 체험하듯이 강정의 역사는 또 다른 어느곳에선가 다시 재현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적 현장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우리가 지금 강정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예전 베들레헴에서 평화의 왕 예수의 현존을 경험하고 새로운 평화의 역사가 시작된 것처럼 이 강정에서 그 사건을 추후적으로 체험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강정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역사신학적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이전 베들레헴에서 성육신(Immanuel)하신 것처럼 지금 강정에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강정은 국가 공권력에 압살된 작은 고을이지만 여기에서 한반도와 동북아와 세계평화가 시작될 것이라는 신앙고백은 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속에서도 이 강정을 지키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당당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고난과 비통속에서 역사적인 신앙고백은 탄생하고 그 신앙고백속에는 평화로운 미래를 여는 예언이 담기기 마련입니다. 강정 그리고 그 안에서 살고있는 우리는 그 역사적 맥락에 놓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