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눈에 숨겨진 평화에 관한 일

(2011제주평화기행 후기 - 강영희)



2011. 4. 3(일)  4.3 위령제에 참석하며

  

   4.3희생자 위령제가 있는 날이다. 새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바람도 제법 거세다. 강정 마을에서 지체들이 지내고 있는 전기와 난방이 되지 않은 빈집에서 잠을 잤는데 몸까지 배어든 찬 기운에 거듭 잠에서 깨곤 했다. 그래도 행복한 이 마음은 무엇일까?

   제주시에 있는 4.3평화공원에서 오전 10시에 시작될 4.3위령제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 8시경 강정마을 분들이 타고 가는 버스에 함께 올랐다. 버스에 타고 계신 분들은 하나같이 4.3 양민학살 사건 때 가족.친지들이 희생된 유족분들이다.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하면 제주에 사는 어느 한 사람이고 유족이 아닌 사람이 있으랴! 오전 8시가 조금 넘어서 강정마을에서 출발한 버스는 10여분을 가다가 잠시 멈추었다. 중문에 따로 세워진 지역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먼저 추모식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어 다시금 버스에 올라 40여분을 간 후 평화공원에 도착하였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제법 추운 가운데에서도 평화공원은 수많은 차량과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입구에서 함께 간 지체들과 함께 흰국화를 사서 병풍처럼 둘러서있는 각명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마을별로 희생된 이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진 비석들로 빙둘러있는 각명비 앞에서 나도 모르게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먹먹한 가슴으로 한 참을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숨이 막혀왔다. 셀 수 없이 수많은 존재들의 죽음을 마주하며 단단히 미쳐버린 세상이 펼쳐져 있는 듯 싶었다. 믿어지지 않는 이상한 세상, 그것도 단단히 미친 세상을 눈앞에 두고 그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가는 것이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강정마을 분들의 이름이 새겨진 각명비 앞에 멈춰서서 흰 국화를 드린 후 잠시 눈을 감았다. 먹먹한 고통이외에 그 어느 것 하나 구체적인 형태의 말이든 생각이든 또렷하게 보여지는 것이 없다. 강정마을 분들의 이름이 새겨진 각명비를 지나 몇 걸음 가다보니 허리가 굽으신 할머니 두 분이 각명비 앞에서 소박한 제를 올리고 계신다. 제주에서 많이 나는 감귤 껍질을 조금씩 뜯어내어 소주잔에 넣은 후 비석에 새겨진 몇 몇 분의 이름을 부르며 따르고 또 따르고 하신다. 잔을 따르시는 할머니 옆에 서 계신 또 한분의 할머니께서 “그 위에 ‘누구 삼촌’도 있잠수꽈” 하시자 “그렇지”하시며 또 잔을 따르신다. 비를 흠뻑 맞으시며 그렇게 거듭 잔을 따르며 제를 올리신다. 할머니 위로 우산을 받쳐드리고 제물을 싸온 보자기 바깥으로 음식들과 물건들이 어수선하게 흐트러진 것들을 정리하며 다시금 보자기를 싸드렸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시며 허리가 흠씬 굽으신 할머니께서는 빗속으로 그렇게 걸음을 옮겨가셨다. 할머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비석 앞에 멈춰 서있는 분들의 모습에 시선을 멈췄다. 각명비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연신 허리를 숙이며 절을 올리시는 할머니, 흰 국화를 드리우는 아주머니, 각명비 가까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내밀어 비석에 새겨진 어느 이름을 말없이 몇 번이고 쓰다듬으시는 할아버지...그 손길에 어루만져지는 분은 누구일까? 어머니요, 아버지요, 누이요, 형이요, 친지요, 친구요....

   오름의 형상이 있는 광장 앞에서 오전 10시에 위령제가 시작되었다. 둥둥 울리는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장대 높이 새 햐얀 종이로 만들어진 수의들이 흩날리며 등장했다. 풀리지 않고 단단히 응어리진 서글픈 한에 서려 하늘로 가고프나 가지 못하고 깊은 슬픔에 흐느끼는 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와 부는 바람과 이어 피어오른 새하얀 안개가 오름 주위로 자욱이 둘러지고 까악까악 울며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하늘 곳곳에서 토해내는 아픔들로 가슴이 먹먹하다. 이 아픔들을 어이해야 할지, 이 아픔들이 토해내는 진실과 바램은 무엇인지..

   4.3위령제가 있었던 오늘의 평화공원은 유족들의 발길로 인해 4.3사건이 과거에 존재했던 역사가 아닌 지금 이 순간 아직도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요, 당시의 아픈 역사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대면했던 삶의 자리가 되어 강한 여운이 머문다. 또 한 가지 과거의 물줄기를 타고 오늘에 이어 여전히 펼쳐지고 있는 역사적 아픔을 마주한 장면이 있다. 유족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니 일흔을 넘어 여든에 가까운, 또는 여든을 넘어서는 어르신들의 모습에서 주로 할머니들의 모습은 많이 보였지만 할아버님들의 모습은 드물게 보였다. 제주 4.3 양민학살 사건이 63주년이 된 것으로 보아 당시 10대 후반에서 20대, 30대의 젊은 남자 청년들이 많이 학살되었음이 보여지는 또 하나의 실증을 마주한 것이다.



2011. 4. 4(월) : 4.3평화공원, 사랑하는 교회


   12시에 제주공항에서 기행팀원들과 만나고 이어 공식적인 기행일정으로 접어들었다. 오늘 오전에 찾은 평화공원은 어제 찾은 평화공원의 분위기와 사뭇 다른 여운으로 머문다.

어제 본 역사의 산 증인들의 모습대신 지난 과거의 역사를 비추어 오늘의 삶을 제대로 살아내기 위한 배움의 목적으로 찾은 이들의 모습, 그리고 오늘은 나 역시 그들과 동일한 자리에 선 위치에서 가슴 보다는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의 끈들을 이어가곤 했다.  수학여행을 온 것인지 10대 청소년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다랑쉬 굴을 재현한 전시관 앞에서 다시금 생각한 것은 역사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이들의 잔인함과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하는 것이었다. 1994년 다랑쉬 굴이 발견이 되고 이로써 제주4.3양민학살사건의 실상이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유해를 유족들에게 돌려드리지 않고 강제로 화장하여 바다에 뿌리고 다랑쉬 굴 입구를 커다란 돌로 막아버린 사건을 생각하니, 유족들의 시린 한을 다시금 짓밟은 그 잔인함에 몸서리가 쳐지고, 죽어서까지도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 편히 쉼을 누리지 못한 체 한 줌 재로 바다에 뿌려져야만 했던 넋들의 고통을 어이해야 할지.

   역사의 진실을 틀어막으려는 이들의 잔인성에서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은 다시금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역사의 진실을 틀어막으려는 이들의 행위에서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더불어 그와 같은 사건을 통해 역사의 진실성이 때로는 너무나 여리고 쉽게 부서지고 외면당해지는 것 같으나 역설적이게도 그럼으로써 그리고 그럼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더욱 또렷이 부활하는 강인함에 왠지 모를 경외감이 인다.


   저녁 시간, 제주사랑하는교회에서 서성환 목사님과의 대화의 시간이 있었다. 4.3양민학살 사건의 역사 속에서 정의에 대해 침묵할 뿐 만 아니라 도리어 가해자의 위치에 섰던 교회의 모습을 성찰하며 그에 대한 회개의 부재에 이어 지금도 정의에 대해 말하지 못 하는, 아니 말할 수 없는 교회의 자기 상실은 여전히 나에게 있어서 안타까움과 함께 그에게서 돌이키는 회개가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 고뇌하게 한다. 자신을 까마득히 잃어버린 것 같은 상황 속에서 다시금 자신을 찾기 위해 한국교회가 정의에 대해 말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회개의 구체적 양상은 도대체 무엇이어야 하는가?

   목사님의 또 다른 말씀 중에서 제주4.3 양민학살 사건이 지금까지도 정의가 결핍되어 있음으로 평화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직시하면서 제주 4.3양민학살사건이 이렇게 뭉그적 되어져 있는 이유에 대해 하신 말씀을 통해 나의 위치를 돌아보았다. 목사님께서는 그 이유가 제주4.3을 겪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제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며 역사적 패배주의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계몽되지 않는 민중이 과연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역사의 주체인 민중으로써 나의 실상은 또한 어떠한가!



4월 5일(화) : 4.3연구소, 강정마을


   제주4.3연구소장님과의 대화를 통해 많은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갔다. 어제 사랑하는교회 서성환 목사님과의 대화에서나 오늘 4.3연구소 김창우 소장님과의 대화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던 내용이 있다. 평화공원이 평화를 모색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공동묘지의 음산한 분위기 같다는 나눔에서 그렇다면 이와 관련하여 평화공원의 올바른 역할 담당 부분에 있어서 “4.3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오고갔고 이에 “기억보다는 ‘치유’를 이야기하려고 하며 그래서 ‘치유의 모색’을 고민하고 있다”고 하셨다. 4.3의 진상이 아직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4.3의 진상과 생명과 평화로 승화할 4.3의 입지를 위해 그것을 담지해야 할 역사 공원으로서의 평화공원의 과제는 무엇일까? 기억하지 않으면 잊혀진다는 서성환 목사님의 말씀과 기억보다는 치유를 이야기하기 위한 치유의 모색의 과제를 언급하신 김창우 소장님의 말씀에서 두 관점이 맞닿아 있는 그 지점 위에 세워질 평화공원의 과제가 쉽지 않은 걸음처럼 보인다. 그리고 쉽지 않은 걸음이지만 한걸음씩 뚜벅뚜벅 진득이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늦은 오후 강정마을에 도착했다. ‘오막살이’라는 민박집의 소박한 이름부터 마음을 따뜻하게 했고 옛 한옥의 분위기가 조금은 묻어나게끔 만들어진 나무로 만들어진 문과 창틀이 주는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내리고 옥상에 올라갔다. 앞으로는 중덕바다가 보이고, 뒤로는 한라산의 정경이 보인다. 한라산을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어느덧 어머니의 치마폭이 널찍이 펼쳐진다. 광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고자 찾아드는 이들을 너른 치마를 펼쳐 그 속으로 숨겨주는 그 어머니의 치마폭. 자녀들을 품고자 하였고, 또한 그리하였으나 끝내 지켜내지 못했던 수많은 목숨들에 대한 통곡을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그 애달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오늘도 그곳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2011. 4. 6(수) - 7(목) : 강정마을


   해군기지건설로 몸살을 앓고 있는 강정마을에서 맞이하는 하루하루.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강정마을에 머무는 동안 공사를 강행하려는 해군과 기업에 대항하여 공사를 막으려는 마을분들과 시민활동가들의 대치 상황이 계속되었다. 해군과 기업의 신고를 받고 현장에 온 경찰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행위를 하는 것이 적잖이 실망스럽고 화가 나기도 했다. 사복을 입고서 교묘히 속임수를 쓰는 모습에서 정직성이 결여된 그 비겁함은 민중의 지팡이라고 하는 그 모든 신뢰를 상실케 만들었다. 공사를 저지하기 위해 차량 밑으로 들어간 분들을 끌어내 연행하려는 경찰을 막아서자 ‘공무집행방해로 함께 연행해 갈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불법공사라고 하는 이 공사에 대해 먼저 조사를 해야 할 것이 아니냐 공사를 저지하는 사람들을 연행해 가기 앞서 불법공사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냐 그것을 하지 않은 것은 경찰의 직무유기가 아니냐’라는 말을 하자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그저 연행해 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연행해 가는 중에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경찰의 이러저러한 행위를 보면서 공권력의 부패함을 실감하며 마음이 쓸쓸하다.

   공사 현장의 대치 상황에서 안타까운 한 가지가 있다. 공사를 막기 위해 항상 대치하는 사람들은 고용된 인부들이라는 것이다. 정작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해결해야 하는 당사자들, 즉 총 책임자들은 나타나지 않고 그저 책상 앞에서 공사 강행을 명하고 있는 것에 분노가 인다. 현장에서의 갈등 상황을 보고, 마을 주민들의 고통을 대면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가기 위한 것에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상황을, 현장을, 고통받고 있는 강정마을 사람들을 만나야 할 것이 아닌가! 일례로 제주4.3 63주년 위령제에 참석했던 김황식 국무총리는 위령제 참석 후에 하는 말이 겨우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해군기지 공사 시행한다’였으니 강정주민들의 고통을 외면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당장 진행되는 공사를 막아야 하는 상황에서 고용된 분들에게 강정마을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은 불법 공사임과 공사가 초래하는 결과를 말씀드리며 공사를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하고, 그날 공사가 진행될 수 없어서 철수하는 인부들에게 고개숙여 죄송함과 고마움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인부들 가운데에는 녹록치 않은 살림을 꾸려가시는 분들도 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강정주민들의 고통을 헤아려 주시고 힘없는 이들이 서로의 삶을 지켜주기를 부탁하며 한분 한분의 마음들이 모아지기를 바랬다.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가 있다. 국가 안보, 평화에 대한 시각과 접근 방법에 있어서의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한 나름의 입장이 정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나라의 상황에서 제주의 해군기지가 진정 국가 안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라를 더욱 위태롭게 하는 것인지, 또한 평화가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지고 지켜지는 것인지, 그리고 이에 제주의 해군기지는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인지..

   고난 주간이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께서 하신 다음의 말씀을 생각해본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19:41-44)’. 4.3평화공원에서 보았던 글귀가 있다.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을 묘사한 글귀인데 갓난 아이를 돌에 쳐서 죽이기도 했다는, 잔인함과 끔찍함에 잠시 숨을 쉴 수 없었던 글귀였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라는 글귀와 4.3평화공원에서 보았던 그 글귀가 하나의 글귀가 되어 또렷이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우리의 근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제주4.3양민학살사건과 지금 진행되고 있는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의 사건 속에서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 눈에 숨겨진 평화에 관한 그 일이...



2011. 4. 8(금) : 4.3유적지

  

   4.3유적지를 가기 위해 서둘러 채비를 하고 나섰다. 송영섭 목사님의 안내로 처음 걸음을 멈춘 곳은 대정리 삼한진 밭이라는 곳이다. 피의자 가족들을 밭에다 들이고 밭에서 50여미터 떨어진 성터 위에서 군경과 토벌대가 총을 겨눠 양민들을 사살한 곳이다.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보이지 않으면 산으로 들어간 무장대 가족이라 하여 대살하고, 무장대가 들어간 집이다라는 말 한마디에 살상당하고...말 한마디에 죽고 살고 하는 그 살얼음과 같은 불안의 기운이 감돌았을 마을..

   대정리 삼한진 밭과 마주하고 있는 5미터 높이 가량의 성읍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이 가리우고, 손이 묶인 체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듯 하다.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상실한 체 삼한진 밭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총구를 드리우고 있는 군경과 토벌대가 보이는 듯 하다. 그 자리에서 죽으나 도망치다 죽으나 매 한가지라 생각하여 무작정 도망을 치다 몇 백미터 떨어진 곳에서 죽은 이도 보이는 듯 하다. 눈이 가려져 보이지 않은 어둠 속에서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고, 두 손이 묶인 체 넘어지니 일어나려 할 때마다 온 몸을 땅에 부벼대고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나고..몇 백미터를 갔다고 하나 눈이 가리우고 손이 묶인 체 갔던 그 모습이 어떠했겠는가!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걸렸겠는가? 총을 겨누고 그런 모습을 한참동안 성읍에서 지켜보는 이들에게서 보이는 잔인함은 또 무엇인가?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무엇이 인간에게서 그 인간성을 송두리째 앗아가는가?


   모슬포 알뜨르 공군기지에 이르러 일제시대의 전쟁의 흔적을 보았다. 20여개의 격납고가 곳곳에 널려있고, 넓디넓은 활주로를 따라 펼쳐진 바다가 보인다. 관제탑에 올라서서 바라보니 활주로에서는 지금이라도 금새 전투기가 활주로를 타고 가다 바다를 향해 날아오르는 듯 하다. 강정 앞바다에는 군함이, 모슬포에는 공군기지가 들어선 풍경이 펼쳐지며 어느 새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것만 같다. 두렵다. 제주의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평화의 섬 제주가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모슬포 공군기지를 벗어나는 차안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차창 밖으로 봄 기운을 머금고 자라나는 들녘의 푸른 채소가 보인다. 그 들녘 가운데에 격납고가 있고 그것을 둘러싸고 푸른 생명이 자라나고 있다. 시체를 치우고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씨알이 깨어지고 더렵혀진 공동체를 회복하는 혁명의 주체라고 하는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을 잠시 떠올렸다. 일제 속에서의 수난과 제주4.3의 수난을 통과해가면서 틔워낸 저 들녘의 푸른 생명과 곱게 핀 들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동광리 큰 넓궤,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모를만큼의 어두운 세상을 만났다. 120여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어든 동광리 큰 넓궤. 거친 현무암 돌들 위로 몸을 뉘었다. 등이 베이고 아프다. 어린 아이들의 울음소리, 아이를 어르는 엄마의 자장가, 변변치 않은 생명의 양식을 준비하는 허리굽으신 할머니, 달그락 거리는 그릇 소리, 위태로움 속에서 서로 보듬어 안는 사람들의 위로와 격려의 소리가 캄캄한 세상,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타고 들려온다.



4월 9일(토) : 강정마을


   중덕바다 맷부리에서 생명평화결사와 함께 100배를 했다. 푸른 중덕바다와 그 바다를 닮은 하늘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몸과 마음을 겸손히 낮추게 하는 생명의 숭고함이 나를 숙연케 한다. 강정마을 집 담에 그려진 중덕바다와 구럼비, 그리고 그 그림과 함께 쓰여진 ‘이 정경 그대로 평화다’라는 문구가 간절한 기도가 되어 살아있는 범섬과 살아있는 구럼비와 살아있는 바다와 그곳에 깃들여 사는 뭇 생명들의 숨으로 현현되어 간절함을 더 한다.



마무리하며 : 제주의 사명


   이 땅 어디인들 수난의 아픔이 배이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마는 제주는 유독 묻어나는 그 아픔이 더 하였다. 그것은 제주 전역이 몸살을 앓고 있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한 뼘 길이의 발자욱의 작은 공간만큼도 쉼의 자리를 허락지 않았고, 내딛는 걸음마다 아픔이 묻어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우리의 역사가 고난의 역사요, 고난은 살아내야 할 역사적 사명, 곧  하늘의 명을 지니고 있음을 말했던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을 곱씹으며 고난의 땅 제주의 명을 숙고해 보았다. 평화의 섬 제주, 그 이름에 명시되어 있는 하늘의 명을 살아내야 할 제주가 그의 깊은 고난만큼이나 한반도의 평화의 구심점이요, 나아가 동북아시아, 세계 인류의 평화의 구심점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제 제주는 그 사명을 살아내야만 한다. 멸시받고 천대받던 이방의 땅 갈릴리, 그 갈릴리와 같은 제주, 고난을 통하여 피어나는 꽃, 그 평화를 살아내야만 한다. 그것이 ‘자기’를 잃지 않는 것이요, ‘자기’를 잃지 않은 그것이 곧 우리의 생명이요, 희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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