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마다 쉼을 얻습니다. 비울 건 비우고 벗어버려야 할 것은 벗어버려야 한다는 듯 텅 빈 고독과 자유, 심성이 그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을 듯한 모습에서 고요함과 맑음이 찾아 듭니다. 자신을 여실히 드러낸 맨 살들 사이사이의 그 여백으로 하늘이 담겨오고, 별빛이 내려앉고, 바람이 드나들고, 가지 사이에 깃들어 나풋나풋 나는 새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여지없이 보입니다. 그렇게 가벼운 몸짓, 비워낸 마음에서야 비로소 타자가 온전히 담길 수 있는 듯싶습니다. 다른 존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온전하고도 아름답게 담아낼 수 있는 그 자신의 비워냄과 고요함, 맑음이 그립습니다. 타자가 자신 안에 온전히 담기고 그가 나란 존재 안에서 일으키는 바람 안에서 비로소 본연의 자신을 만나는 신비를 보게 됩니다.

 

지난 2011년 한해, 지역 초등학교에서 매주 한번에서 많게는 두 번, 광명시에 있는 중학교에서는 한 달에 한번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평화캠프 사전교육과 샘터를 방문한 청년들과의 만남도 있었습니다. 지난 1년여의 평화교육을 돌아보며 그 시간 속 함께 한 존재들, 그리고 그들과의 만남이 빚어낸 삶. 그 모든 것이 무엇으로 이야기 될 수 있을까갑자기 현재의 시간에서 멈춰서고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 바늘을 따라 옛 시간을 더듬어 봅니다. 지난 기억들을 더듬어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며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봅니다. 장면 장면이 오고 가고, 어린 벗들과 함께 한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모습이 보이고, 순간순간마다 내면에 잔물결을 일으킨 울림이 다시금 어렴풋하게 일어납니다.

 

지역 초등학교 아이들과는 지난해 3, 그 첫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혁신학교로 선정되어 마음교실을 마련하고 저희들을 기꺼이 맞아주셨습니다. 전교생이 60명 정도인 작은 학교입니다. 아이들을 만나기 전 학교로부터 만나게 될 아이들에 대해 전해 들었습니다. 엄마, 아빠와 함께 하는 단란하고 조촐한 가족대신 많은 형과 누나, 오빠와 언니, 그리고 친구들, 동생들과 함께 대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는 친구들이 많은 곳이라고, 그래서 상처가 많고 그 상처로 인해 자신뿐 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아프게 하는 친구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친구들이어서 일까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더욱 만나고 싶었습니다. 만남을 소중히 준비하고, 정성 들여 만나고 싶었습니다. 아무것도 해 줄게 없지만 그저 그 친구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 줄 아는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습니다.

첫 번째 학기에는 스무 명의 5,6 학년 친구들을, 두 번째 학기에는 1학년에서 6학년 전체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개척자들 평화교육팀도 첫 번째 학기에는 모두 함께 한 교실에서 팀티칭으로 평화교육을 진행했고 두 번째 학기에는 두 사람씩 나누어 1.2학년, 3.4학년, 5학년, 6학년 교실로 들어가 교육을 진행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이름을 짓고 서로에게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김춘추 님의 이라는 시에서처럼 그렇게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을 통해 서로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는 첫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러한 첫 만남에 이어 친밀함과 안전함을 형성하기 위해 우리들의 약속을 만들어가고,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을 경험하기 위한 활동들을 하고, 갈등과 분노의 근원이 되는 욕구를 찾아 자신의 느낌과 욕구를 표현해보고, 비폭력 대화를 연습하고, 내 안에 있는 평화에 대한 나눔으로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매 학기마다 한 두 번씩은 공동체 가족 수업이라는 이름으로 1학년에서 6학년 친구들 모두가 함께하는 평화수업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시간 속에서의 몇몇 울림을 나눕니다.

4학년 친구들과 함께 했던 평화수업 첫 날, 평화수업을 마무리 하며 손을 잡고 동그랗게 둘러서서 그 날 평화수업을 하면서 생각하거나 느낀 것을 나누었습니다. 이때 한 남자 친구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는 배려가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됐어요.”

5,6학년 친구들은 상반기부터 만난 친구들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렇게 한 해를 만나왔습니다. 이 친구들에게서 나타난 변화에 얼마나 가슴 뭉클하던지요. 이 작은 벗들이 많이 고마웠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에 찾아 든 환한 미소와 울컥함이 행복해 보여서 기뻤습니다. 깨어진 본연의 자기를 회복해가는 모습에 왠지 모를 눈물이 일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다(4:26-28)’ 눈에 띄게 나타난 아이들의 변화는 조금씩 조금씩 보여지는 점진적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한 순간 봇물 터지듯 기적처럼 나타난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동안에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씨를 뿌린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는 그런 이치와 같은 것이겠지요. 생명의 나고 자람의 경이로운 신비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만나면서 평화교육에 대해 더 깊은 배움과 내실을 다지고 싶었던 바램이 한층 더 깊어졌습니다. 그리고 중심이며 관건이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새로운 내가 되어야 할 회복이면 회복이요, 창조라면 창조일 내 자신의 변화임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6학년 친구들 안에는 뚜렷이 보이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왕따 문제입니다. 몇몇 아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한 여자 친구를 기피했습니다. 그 친구 옆에는 앉으려 하지 않고, 있는 자리에서 피하고, 웃고, 마음 상할 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 친구는 화를 내거나 속상해 하는 기색도 없이 친구들의 그러한 태도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첫 만남 때부터 보여진 이 문제가 평화수업을 해오는 내내 우리의 과제임을 생각하고 그 사안에 대해 평화교육팀 안에서 잦은 나눔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지막 평화수업시간, 6학년 교실 안에서 왕따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이요, 3자가 아닌 당사자의 문제로 아이들 모두가 직접 대면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쉽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단순한 윤리적 차원으로 접근할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문제입니다. 왕따를 당하는 친구나 왕따를 시키는 아이들 모두의 마음에 상처만 남게 되는 상황이 되지 않도록 신중하고 지혜로운 접근이 필요했습니다. 어느 한편만의 문제로 인식되거나 무게중심이 실리지 않도록, 왕따를 당하고 왕따를 시키는 두 가지 입장으로 확연히 구분되고 아이들 각자가 그 중 하나의 입장에만 절대적으로 속하게 되는 그런 구도적 접근을 삼가고, 아이들로 하여금 정죄나 책임 추궁과 질책을 받는 느낌이 아닌 스스로를 돌아보고 서로를 존중하며, 스스로가 그들 모두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가고, 새로운 변화를 위한 입장에서 문제를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접근을 고려하여 활동을 기획하고 진행했습니다. 먼저 내 탓이 아니야라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학생들이 왕따 문제를 고민할 수 있도록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스토리텔링을 통해 왕따를 당하는 입장, 왕따를 시켜본 입장에서 각자의 느낌과 생각을 적어보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왕따와 관련한 평화교육 교사들의 경험담을 아이들과 나누었습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고 선생님도 자신들과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들로 하여금 긴장을 풀고 좀더 편안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했습니다. 또한 그러한 공유된 경험은 이해와 관용, 공감을 통한 신뢰 관계를 만들어줌으로써 왕따 문제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대면할 수 있는 용기와 나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성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전환으로의 물꼬를 트는 첫 걸음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나누었던 저의 어린 시절 경험은 왕따 문제가 긍정적으로 해결된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고정관념 속에 갇히고 굳어진 시선과 인식이 마치 진실인것인냥 아무런 문제인식 없이 반복되어 흘러오다가 새로운 인식의 전환과 맞닥뜨렸을 때의 그 신선한 기운은 문제를 창조적으로 해결해 갈 수 있는 창조적 돌파구에 대한 모색을 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평화교육 교사들의 경험을 나눈 후 아이들이 왕따 당하는 입장, 왕따 시키는 입장에서의 느낌과 생각을 썼던 글 중 일부를 모든 친구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화의 기운이 담긴 글을 통해 서로를 격려하고 그 기운을 자신의 마음에 담아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동그랗게 둘러 앉았습니다. 평화의 기운을 담을 수 있는 한 두 문장의 단출한 글귀가 적힌 색지 조각을 하나씩 뽑은 다음, 한 사람, 한 사람 촛불을 밝히고 그 글을 읽어갔습니다. 동그랗게 앉아 나누던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원하는 교실 공간으로 흩어져 다시금 그 글들을 한 사람씩 자유롭게 돌아가며 읽었습니다. 그러한 평화의 기운으로 자신을 치유해가고 자신의 몫만큼 주위를 밝히는 작은 촛불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진지하게 참여하는 친구들이 얼마나 대견하고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졸업여행을 며칠 앞두고 있는 6학년 친구들이었습니다. 초등학교의 시절이 모두에게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상처 주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부탁도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에게라도 그러한 소외와 상처가 주어진다면 결코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나눔도 함께 했습니다. 아픔이 묻어난 부탁이었고, 진중한 표정과 말투로 나누었습니다. 아이들의 분위기가 고요해졌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꺾이는 어둡고 침울한 기운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진지한 돌아봄이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3학년 교실에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라는 물음을 여는 질문으로 나누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산소, 우정, 심장, 마음 등이 나오는데 마지막으로 그 반에서 가장 개구진 친구, 수업시간에 이곳 저곳을 산만하게 돌아다니기도 하는 친구가 큰 소리로 이야기 합니다. “아픔!”. 어쩌면 이리도...마음에 깊이 와 닿는 말이었습니다. 소중한 것을 잃은 상실감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며 한 달 가까운 시간 동안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 선생님의 여는 질문에 대한 그 아이의 대답이 하늘의 음성 같았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와 만짐인 듯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답한 그 아이의 아픔이라는 말에 빛나는 호수 선생님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한달 동안 만나지 못했던 것은 제게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마음이 너무나 아파서 여러분들을 만나지 못했답니다.” 빛나는 호수 선생님의 아픔이 무엇인지 그것으로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를 곁에서 지켜본 저에게는 당시 그 어린 친구의 아픔이라는 대답과 그 대답에 응답하여 마음이 아파서 만나러 올 수 없었다는 빛나는 호수 선생님의 나눔이 참으로 진솔하게 다가왔습니다. 어린 아이들 앞이라고 대충 둘러대는 대답이 아니라 친구를 대하듯 자신의 아픔을 솔직하게 나눌 줄 아는 선생님과, 어린 친구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아픔이라는 대답을 건넨 이 장면은 서로의 소중함이 나누어지고 서로의 마음이 진실하게 소통되고 있음이 느껴지는 시간이었고, 그 시간은 제게 적잖이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마음과 마음을 주고 받는 그 우정이 고맙고 아름다웠습니다.  

... 평화수업 교실 분위기는 어떠했냐구요? ㅎㅎ 어떤 모습일 것 같나요?^^ 물론 반 마다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어수선하고 산만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평화수업을 지켜보는 학교 선생님들의 표정이 난해합니다. 더 난해해 하신 것은 그러한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단호한 제재를 하지 않는 평화교육 교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평화수업 마지막 즈음 그러한 방식에 대해 물어오셨습니다. 어수선하고 시끌벅적한 교실 상황. 그 속에서 아이들의 행동을 즉각적인 침묵으로 옮겨가는 통제를 평화수업에서는 기피합니다. 개척자들의 평화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공감입니다. 그리고 공감에 있어서 경청은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입니다. 누군가가 귀 기울여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마음을 헤아려준다면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내 보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공감을 위해서는 내 입장과 내 주장을 잠시 내려놓고 철저히 타인의 입장에서 들으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에라야 비로소 상대방의 말이 들리고 마음이 보이니까요. 그래서 결국은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구나! 라는 것을 이해하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억지가 아닌 진정한 이해와 배려에서 수용할 수 있게 되고 진정성 있는 소통을 해갈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공감과 관련해서 평화교육의 배움의 장에서는 아이들을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만나게 됩니다. 당장 눈에 보여지는 행동에 대해 표면적이고 즉각적인 판단으로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이 어떤 행동과 반응을 보일 때, 그것이 긍정적인 반응이던지 부정적인 반응이던지 간에 그렇게 행동하는 아이들의 내면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은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특히 평화교육에서 때로는 시간을 들여 기다려주어야 하고, 공감과 아이들의 욕구를 헤아리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고 필요한데 그것은 평화교육이라는 것이 머리 속에 지식을 채우는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신뢰가 형성되고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만져져야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자칫 평화가 아닌 폭력으로 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즉각적인 판단과 통제적 반응으로 다가서지 않고, 아이의 입장을 듣고 소통과 공감의 과정을 통해 다가섭니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뢰와 공감을 담아낼 수 있는 관계형성이 이루어지고, 마음과 마음이 오고 가는 평화수업이 될 때에 비로소 아이들의 변화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강제적인 통제가 아닌 아이들의 마음이 스스로 움직여져서 잡혀지는 질서,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변화된 하나의 모습입니다.

 

   광명시에 있는 중학교 친구들과의 만남은 2010 12, 3학년 친구들과의 첫 만남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차이로 인한 차별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차이의 인정이 다양성을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라는 목표로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이러한 학습목표 하에 한 활동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차별에 대한 정당성 또는 부당성에 대한 토론을 했었는데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이해 수준과 다를 게 없을 만큼 학생들의 각자의 주장에 대한 이유들이 제법 성숙했습니다. 학생들의 생각은 저희들로 하여금 더욱 깊이 사고하고 들여다 볼 것을, 무엇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내야 할 것을 고무시켜 주었습니다. 이 후, 한 달에 한 번씩 평화수업으로 1,2학년 친구들을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사실 평화 수업이라는 것이 지식 주입을 위한 일방적인 강의 교육이 아니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이라는 만남의 시간은 여러모로 아쉬움과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대체로 그러하지만 평화수업 역시 무엇보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신뢰가 구축되어야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의 마음이 맞닿을 수 있을 보다 잦은 만남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는 아쉬운 만남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만남의 횟수가 더해질수록 우리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빛과 우리에게 맞닿는 마음의 결이 조금씩 변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사인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구요. 이렇듯 존재가 존재 속으로 깃드는 것은 실로 신비롭고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자신과 타인이 좋아하는 것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같음과 다름을 보는 것, 평화수업 시간에 지켜야 할 우리들의 약속을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어 보는 것, 분노와 폭력에 대한 비폭력적이고 대안적인 해결 찾기, 의사소통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알아보며 갈등상황에서의 대화를 긴장을 풀어가는 대화로 바꾸어 보는 연습, 경쟁적 문제 해결 방식이 아닌 협력적 문제 해결 방식을 경험해 보는 것, 상호신뢰와 존중을 통해 자유롭고 창의적인 의사결정과정을 배우고 경험해 보는 것, 갈등 상황에서의 대화법 및 내면의 힘을 발견해보는 것들로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마지막 평화수업의 마지막 활동으로 공동체()에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좋은 힘을 하나씩 찾아서 커다란 하트모양에 자신의 내면에 있는 긍정의 기운이 적힌 종이 조각을 채워 넣는 활동을 하면서, 마음 한 켠이 흐뭇하면서도 아팠습니다. 학생들이 담아내는 소박한 그 평화의 기운은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 사회의 구조가 학생들이 그들 내면에 지니고 있는 평화의 기운을 끌어내어 흘려 보내지 못하게 할 만큼 학생들에게 과중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고 그러한 요구가 꼭 건강한 것만도 아닌 것이 학생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 한 켠이 아팠습니다. 자신이 가진 분량과 몫을 성실히 살아내는 것과 그 각자의 분량과 몫이 한 귀퉁이, 한 귀퉁이를 채워줌으로 이 땅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이치가 이 학생들의 삶에 깃들 수 있도록, 그래서 학생들의 자아와 삶이 깨어지지 않도록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함을 생각합니다.

컨소시엄으로 이루어진 중학교 평화교육은 함께 했던 여러 단체의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도움과 배움을 누리기도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한 가지의 통일된 주제를 단체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가고, 수업 후 그날 평화수업을 돌아보며 했던 나눔을 통해 가지고 있던 의문 속에 한 줄기 빛이 비춰오기도 했고, 새로운 고민을 하게끔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평화교육을 통해 보고 느꼈던 것은 평화교육은 아이들이 그들의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평화적 힘을 발견해 가고 가장 자기다운 모습을 회복해가는 것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의 구조 안에서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중과 참 삶과 행복을 상실해 가고 있는 아이들이 자신과 타인을 긍정하고,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고 도리어 다양성으로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 내면에 대한 경청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고 타인에 대해 공감할 줄 알며, 경쟁이 아닌 서로 돕고 협력함으로 문제를 해결해 가고, 갈등을 폭력이 아닌 서로의 성장과 성숙으로 전환시켜 갈 줄 알며, 각자의 몫을 성실히 살아내고 그 각자의 몫이 한 귀퉁이, 한 귀퉁이를 채워가면서 조화롭고 평화로운 삶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느끼고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제게는 이것이 평화적 감수성입니다. 이러한 평화적 감수성이 곧 평화적 삶이라는 열매로 영글어져 가는 것을 꿈꾸고 기대하며 아이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또한 평화교육은 무엇보다 저를 새롭게 합니다. 평화교육을 통해 내 안의 폭력성을 발견하게 되고, 지난 시간 나의 그 폭력성을 인하여 마음을 다친 이들에게 몹시 미안한 마음, 그래서 문득문득 그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눈물이 나곤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제 안의 폭력성을 대면하고 싶습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겠지만 끊임없이 직면하고 대면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란 존재임을 인정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그러한 내 자신을 나의 가장 깊고 내밀한 영혼의 자리로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그런 다음 그 자리에 평화의 씨앗을 힘써 심고자 합니다.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동안에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씨를 뿌린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는 그런 이치의 생명의 남을 어느 날 봇물 터지듯 갑작스런 기적처럼 만나게 되는 날을 꿈꾸며 말입니다.

이렇듯 평화교육은 제 자신을 새롭게 만나는 여정입니다. 본연의 내 자신을 만나고픈 목마름이 컸습니다. 잃어버린 내가 무엇인지, 무엇을 어디에다 잃어버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리움과 목마름이 잃어버림을 알게 해 주었고, 그 잃어버림은 목마름이 되어 나를 살게 하는 희망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현주 목사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랫동안 나를 잃어버리고 살아왔다. 그러나 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니, 다시 찾으면 된다. 더구나 내가 잃어버린 나는 한 순간도 나를 떠난 적이 없다지 않은가!'… 윤동주 선생님의 고백처럼 제가 사는 것은 어쩌면 잃은 것을 찾는 까닭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다행인 것은 잃어버린 내가 한 순간도 나를 떠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잃어버린 나를 찾는 것이 평화라고 한다면, 평화교육은 그 여정에서 나를 이끌어주고 도와주는 작은 손 내밂입니다. 그리고 함께하는 동료들과 어린 벗들은 제 안에 평화의 씨앗을 심어주는 이요, 저를 새롭게 변화시켜가는 이요, 잃어버린 나를 찾게 해 줄 그런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들로서 곧 저의 생명의 빛입니다. 그 생명의 빛은 오늘도 본연의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 속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입니다. 그 바람을 타고 자신을 비워냄으로 다른 존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온전하고 아름답게 담아내는 겨울 나무의 쉼에 살며시 깃들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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