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3일 금주의 세계

2016.05.23 14:58

개척자들 조회 수:97

20160523 세계를 위한 기도

 

1. 대만 국민당 정권을 8년 만에 교체하고 첫 여성 지도자 자리에 오른 차이잉원 신임 총통의 입에서 끝내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는 단어 ‘92공식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2. 인도에서 최고 섭씨 51도에 이르는 기록적인 폭염과 가뭄이 이어지면서 두 달 새 열사병과 탈수로 400여 명이 사망하는 등 고통이 커지고 있습니다.

3. 36년 전, 광주에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 차이잉원 '하나의 중국'보다 "온건한 양안 정책"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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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국민당 정권을 8년 만에 교체하고 첫 여성 지도자 자리에 오른 차이잉원 신임 총통의 입에서 끝내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는 단어 ‘92공식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취임식장에서는 대만 민주화와 독립을 상징해 38년 계엄통치 시절 금지곡이었던메이리다오(美麗島)’가 울려퍼졌습니다. 취임연설에서는 대만은 41, 중화민국은 5번 언급되었습니다. 긴장 국면에 들어선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관계를 보여주는 20일 차이 총통 취임식의 상징적인 장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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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 총통은 취임연설에서 1992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각자 명칭을 사용한다는 합의인 92공식은 입에 담지 않고 당시 이런 내용을 논의한 양안 회담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만 언급했습니다. 그는 “1992년 양안 기구가 대화와 협상을 통해 다양한 공감대를 갖고 합의를 이뤘다면서상호이해와 구동존이(求同存異·다름을 인정하고 같은 점을 찾는다)의 정신에 의해 이뤄졌다고 말했습니다. 대중국 경제적 의존도를 고려해 온건한 양안정책을 말하면서도 92공식 수용에는 선을 그은 것입니다. 92공식을 주도한 국민당 출신 마잉주(馬英九) 전임 총통이 2008년 취임식에서 92공식을 기조로 양안 관계를 개선하겠다고 한 것과 온도차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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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92공식을 인정하라고 재차 압박하고 있습니다. 중국 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은 이날 담화를 내양안관계의 근본적 문제에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하나의 중국 원칙을 확인해야 양안 간 제도적 교류와 왕래가 계속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대만 정국에 어떤 변화가 생겨도 중국은 대만 독립을 반대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인민일보 자매지인 환구시보는 사설에서대만해협이 새로운 불확실성의 시기에 들어섰다고 논평했습니다.

 

출처: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202220005&code=970204

 

기도제목: 차이잉원 총통과 새로운 대만정부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일꾼을 키우고 평등하고 지속가능한 평화의 길을 개척해갈 수 있도록.

 


2. 51도 폭염·가뭄에 신음하는 인도두달간 400여명 사망(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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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인도 북서부 라자스탄 주 팔로디 마을에서 인도 사상 최고 기온인 51℃가 관측되었습니다. 같은 날 서부 구자라트 주 아메다바드 시 기온도 100년 만에 이 지역 최고인 48℃를 기록하는 등 인도 곳곳에서 연일 46℃가 넘는 폭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더위로 야외에서 일하는 노동자, 농민과 노숙자 등을 중심으로 열사병 사망자가 늘고 있습니다. 지난달 초순 45℃를 넘는 폭염이 시작된 남부 텔랑가나 주에서만 지난 두 달간 열사병과 탈수 등으로 30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서부 마하라슈트라 주에서는 열사병으로 지난 이틀간 9명이 사망했으며 중부 마디아 프라데시주에서는 19 20세 학생을 포함해 2명이 사망했습니다. 인도 매체 '힌두스탄타임스' "폭염으로 4월부터 현재까지 인도 전역에서 400여 명이 사망했다"고 전했습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더위 사망자는 더욱 많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뉴델리에 본부를 둔 시민단체 전체적 발전센터(CHD) "지난 45일간 노숙자 377명이 사망했다"면서 "이들의 사망도 더위와 관련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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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스탄 주 둥가르푸르에서는 20일 나무에 매달려 사는 박쥐 300마리가 한꺼번에 나무에서 떨어져 죽은 채 발견됐습니다. 현지 위생조사관은 "살갗이 얇은 박쥐들이 더위를 견디지 못해 집단 폐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북부 히마찰 프라데시 주에서는 피르 판잘과 다울라다르 산맥 등의 3천m대 봉우리에 쌓인 눈이 예년보다 한 달 가까이 빨리 녹았다고 타임스오브인디아는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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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뿐 아니라 수개월째 이어진 가뭄은 주민의 고통을 한층 가중하고 있습니다. 뉴델리에서는 올해 1월부터 지금까지 강수량이 예년 평균 59㎜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17㎜에 불과합니다. 인도 당국은 전 국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3천만 명이 가뭄으로 인한 식수와 용수 부족을 겪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지난 16일에는 북부 하리아나 주 진드 지역의 니다나 마을에서 불가촉천민(달리트) 출신 청년 5명이 버려진 우물을 되살려 사용하고자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우물 내부에 가득한 유독가스를 들이마시고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시민들은 정부가 이 같은 폭염·가뭄에 야외활동 자제 등을 촉구할 뿐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마하라슈트라 주는 폭염으로 인한 사망도 홍수 등 다른 재난과 마찬가지로 유가족들이 연방정부 구호금을 받을 수 있도록 연방에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출처: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5/21/0200000000AKR20160521045600077.HTML?input=1195m

 

기도제목: 인도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보여지는 어그러진 생태계의 모습과 희생되는 수많은 생명들에 대해 모든 국가와 사람들이 책임감을 갖고 협력하여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해 갈 수 있도록.

 


3. 5·18을 모르는 당신에게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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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전, 광주에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5·18은 ‘민주화운동’이라는 단어로 박제화된 채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5·18을 잘 모르는 우리’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이 기사는 5·18기념재단 등의 기록을 발췌해 재구성했습니다.

1. 518일은 국가 기념일입니다. 36년 전 오늘,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80 518일은 광주에서 신군부에 맞서는 민주화운동이 본격화한 날로서 518일은 1997년 국가 기념일로 지정됐습니다. 기념일 지정 결정 직전인 1997 417일 전두환·노태우의 반란 및 내란 혐의가 확정됐고 공식 명칭도 ‘5·18민주화운동’으로 통일됐습니다. 시민들이 ‘저항하고 싸웠다’는 점에 방점을 두어 ‘5·18광주항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간혹 ‘광주사태’라고 부르는 이가 있는데, ‘사태’는 시위대의 폭력성에 무게를 둔 표현으로, 신군부가 사건을 은폐하고 왜곡할 때 사용한 용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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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80년 광주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18일 군 투입…총을 쐈습니다, 21일 시민군이 생겨났습니다. 일부 극우인사·단체는 아직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을 ‘폭도’라고 왜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민군 이전에 계엄군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518일 계엄령이 내려지자 광주 전남대 부근에도 계엄군이 투입되었고, 장갑차와 헬기를 동원하고 시민들에게 총을 겨눴습니다. 19일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으로 공수부대가 추가 투입되어 21일 계엄군은 도청에 모인 시민을 향해 무차별 발포해서 54명이 숨지고 500여명이 부상당했습니다. 무차별 발포는 시민들이 ‘시민군’으로 바뀌는 결정적 계기가 되어, 시민들은 광주·화순·담양 지역의 파출소 등에서 무기를 꺼내 광주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시가전을 벌였고, 21일부터 26일까지는 항쟁의 중심이었던 전남도청을 목숨 걸고 지킵니다. 527일 새벽 4시께 전남도청 진압을 시작한 계엄군은 1시간여 만에 도청을 접수했습니다. 5·18기념재단은 이날 도청에서 희생된 인원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라고 말합니다. 2001년 정부 발표를 보면, 항쟁 당시 사망자 수는 민간인 168명을 포함해 195, 부상자는 4782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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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학살의 책임자’ 전두환·노태우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습니다.

1980년 광주의 희생은 7년 뒤 대규모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집니다. 1987 6월항쟁에 힘입어 이듬해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했고, 국회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합니다. 1992, 시민들은 김영삼 문민정부를 출범시키며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져온 30여년 군사정권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여론에도 1993 5월 김영삼은 5·18 특별담화에서 “진상규명과 관련해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이에 시민사회는 전두환·노태우 등 책임자들을 서울지방검찰청에 고소·고발하지만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희대의 궤변을 앞세워 전·노 등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시민학살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습니다. 더욱 거세진 전·노 처벌 여론에 국회는 1995 12월 여야 합의로 “1979 1212일과 1980 518일을 전후해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행위에 대하여는 1993 224일까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 것으로 본다”고 규정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과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킵니다. 전두환은 1997 4월 대법원에서 반란 및 내란수괴, 내란 목적 살인 및 상관 살해 미수 등으로 무기징역을, 전직 대통령 노태우는 징역 17(반란 및 내란 중요 임무 종사와 상관 살해 미수 등)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해 1222일 김영삼은 국민대화합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전·노를 특별사면했습니다. 처벌은 흐지부지 끝났습니다. 3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1980 521일 오후 1시 광주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무차별 집단 발포를 명령한 자가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광주는 현재진행형입니다. 5·18 광주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들 아셨겠지만, 2016학년도 5·18 탐구영역의 답은 모두 1번입니다.

 

출처: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44343.html

 

기도제목: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 되어 다시금 우리들의 생명과 자유를 빼앗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진실을 망각시키려는 이들과 실상에 분노할 줄 알고, 역사의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노력에 함께 힘쓸 수 있도록.

 

이 땅의 Christian들이 평화를 위한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하며 고통 당하는 이웃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용기를 갖도록 기도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