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감된 지 3개월이 지났다. 장마전선이 북쪽으로 올라가고 이곳은 무덥고 후텁지근한 여름 날씨가 찾아왔다. 한라산은 거의 언제나 짙은 구름에 가리워져서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가끔 구름 사이로 비추이는 한라산의 산록은 거의 검푸른 색깔이 되어 버렸다.
지난 금요일 민철이가 수면제를 몰래 숨겨오다가 교도관에게 걸렸다. 작은 플라스틱 통에 60개도 넘는 수면제를 모아 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우울증세를 앓는 사람이 아니어서 자살을 할 의도는 전혀 없었을 것 같았다. 원래 성격이 다혈질이어서 부인을 폭행한데다 내용을 알려주지 않아 내막을 잘 모르겠지만 강간혐의까지 있다. 형사소송에 이혼소송까지 겹쳐있어 인생이 복잡하게 꼬인 젊은이이지만 기술도 많고 좋은 집도 있는데다 여러 부인들에게서 얻은 아이들에 대해서는 몹시 정을 붙이고 있어서 자살동기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 일로 담당 교도관은 주말에 퇴근해서 편히 쉬고 있다가 다시 교도소로 불려 와 경위서까지 쓰는 수모를 겪었다고 하니 봉사자인 내가 면목이 없고 속상했다. 그 일로 인해 우리 방의 수감자들이 더욱 예민해졌고 서로 갈등과 충돌이 잦아졌다. 무엇인가 불안하고 자신도 피해를 당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피해의식까지 겹쳐 서로에 대해 날카롭게 상처를 주고 받았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까지도 예민해졌고 수감자들에게 규칙과 질서에 대해 조금은 더 엄격하게 당부하게 되었다. 오늘 아침 정기 모임(우리 수감자들은 반상회라고 부른다.)에서도 다시 민철이의 수면제 수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서로 노력하자고 다시 상기시켰다. 여전히 회의에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민철이 사건은 회의의 주제로 다룰만하다는 데에는 모든 수감자들이 동의하는 눈치였다.


잉게 숄이 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다시 읽었다. 나찌 치하에서 저항했었던 뮌헨 대학생들의 가슴 저미는 슬픈 이야기다. 왠지 히틀러의 나찌 독일이 오늘날 민주주의가 퇴보하고 비밀주의가 성행하는 우리나라의 이명박정권과 닮은꼴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그는 조국의 위대성과 번영, 복지를 위해 일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빵과 직장을 약속했으며 국민 모두가 독립된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이 조국에서 영위할 때까지 쉬지 않고 일하겠다고 공약했다.”
이것은 히틀러의 약속이었다. 숄의 아버지는 히틀러의 등장으로 독일 국민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갈등과 고통을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전쟁이야, 평화스럽게 지내온 같은 민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란다. 저항할 힘이 없는 개개인으로부터, 그들의 어린이들의 행복과 자유를 앗아가는 전쟁이란 말이다. 참으로 끔찍한 죄악이야.”
나는 이런 고백을 강정주민들에게서 여러 차례 들어왔다.


“우리는 마치 언뜻 보기에는 아름답고 깨끗한 집이지만, 꽉 닫힌 지하실 안에서는 무섭고 공포에 찬 기분 나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집에서 살고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는 한스 숄의 느낌이 바로 우리들의 기분이 아닌가? 4대강, 아라뱃길, 한강르네상스 등으로 화려하게 포장된 이명박정권의 치장들 배후에서 용산 참사, 한진중공업과 쌍용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의 숱한 죽음들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아닌가? 이 젊은이들이 느꼈던 “종종 이 세상이 낯설고 고독하며, 신에게 버림 받은 땅이라는 느낌”이 바로 우리들의 경험과도 같았다.


백장미회의 첫 번째 편지에는 프리드리히 쉴러의 ‘리쿠르구스와 솔론의 입법’에서 인용한 글이 있다.
“국가는 결코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국가의 존재란 단지 그 체제 밑에서,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계약으로서의 중요성을 갖고 있을 뿐이다. ……  헌법체제가 정신의 발전을 거부하고 있다면 마땅히 그 체제는 유해한 것이며 배척되어야 한다.”



전장터에서 돌아온 한스 숄의 생각은 바로 우리들의 염원이기도 하다. “결국 언제 가서야 이 나라는 수백만의 평범한 사람들이 갈구하는 조그마한 행복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언제 가서야 이 나라는 매일매일의 평범한 삶을 짓밟아 버리는 맹목적인 국가이념의 멍에로부터 벗어날 것인가? 언제 가서야 저들은 국민 전체를 위해서나 개개인을 위해서도 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보이지 않게 노력하는 것이 전장에서 이기는 것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까?”



백장미회의 세 번째 편지 머리문장에는 이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Salus publica suprema lex – 최상의 법은 국민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당시의 신문들에 대한 기록도 우리나라의 신문방송을 연상시킨다.
“신문은 …… 사람들의 정신을 애매모호한 어둠 속에 몰아넣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사람들이 무더기로 전사해 버리는 사실에 대해서도 보고가 없다. …… 신문기사라는 것이 그들 죄수의 창백한 얼굴 뒤쪽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지 못하고, 그들의 뛰는 심장의 소리를 듣지 못하며, 전 독일에 울려 퍼지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이 젊은이들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도 비관적이었다.
“나는 오늘날 경건한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신의 자취를 쫓아가는 인간들이 하는 짓이라는 것이 고작 칼부림과 같은 수치스러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단지 존재만을 위한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가 인간의 삶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스 숄과 소피 숄은 아버지와 어느 봄날 산책을 하면서 들었던 아빠의 소원을 잊지 못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비록 인생의 길이 험난하다 할지라도 너희들이 인생을 자유롭고 올바르게 살아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나도 내 자녀들이 이런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스 숄은 25세의 나이에 처형당했다. 그는 감옥 벽에 “모든 폭력에 대항하여 꿋꿋하게 살리라.” 고 새기고 사라졌다. 그의 아버지가 늘 중얼거렸던 괴테의 문구였다. 그의 여동생 소피 숄은 22세의 나이에 처형당했다. 그녀의 감옥에는 그 뒷면에 자유(Freiheit)라는 말만이 쓰여진 공소장이 뒹굴고 있었다.
독일뿐 아니라 전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던 권력자 히틀러와 나찌들은 역사의 저편으로 다 사라졌다. 비참하고도 초라한 몰락이다. 그러나 슬픈 죽음을 당한 이 젊은이들의 영혼은 우리의 가슴속에 다시 살아나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다. 진실은 연약해 보여도 가장 강한 것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증인 살아있을 때에라야만 진실은 그 힘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진실을 증거할 사람이 없다면 이 세상은 여전히 암흑 시대로 남아 있으리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최후의 증인처럼 살아가야 한다. 같은 해 7월 처형당한 후버(Huber) 교수는 최후진술문의 마지막을 피히테의 시 한 구절로 맺고 있다.



“너는 독일의 모든 것이
너와 너의 행동에 달려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해야만 한다.
그것이 너의 책임이다.”



이 시대의 어둠을 밝힐 촛불을 들어야 할 우리 모두에게 울리는 메아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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